
어느 희귀병 어린이의 수술
전공의 1년차 때의 일이다. 정규 수술은 없고 비교적 한가한 추석연휴. 소아신경외과 담당 주치의로서 어린이병원에서 4년차 치프 레지던트와 둘이서 환자들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낮에 밀린 차트를 쓰고 치프 선생님은 논문쓰고 환자들도 큰 문제 없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내일이면 추석 연휴가 끝이 난다.
오랜만에 치프 선생님과 오붓하게 대학로에 저녁 먹으러 갔다. 이런저런 일로 1년차를 혼내던 치프 선생님도 편안한 연휴이다 보니 한없이 너그러워 저녁먹고 차도 한잔 마셨다. 맥주였을지도 모르겠다. 전화가 온다. 아 이런... 응급실이다. 전원 문의, 아니 전원 통보다. 전라도 어느 대학병원에서 세살 어린이를 전원시킨단다. 글란쯔만쓰롬바쎄니아 환아인데 뇌출혈이 생겨 수술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서울로 보낸다는 것이다. 인턴 선생이 아주 또박또박 병명을 알려줬고 나는 들은대로 치프 선생님께 보고했다. 1년차인 나는 처음 들어본 병명이지만 하늘같은 치프 선생님은 당연히 모든 걸 알고계실테니까... 그런데 보고하니 치프 선생님이 그건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하신다. 나만 모르는게 아니었다. 응급실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인턴 선생 그런데 그게 무슨 병이지? 자기도 모른단다. 자기는 모르지만 나는 레지던트이니 알거라고 생각하고 보고했단다. 다행히 옆에서 듣고있던 소아과 레지던트가 소아과 교과서를 뒤져서 무슨 병인지 알려줬다. 그 두꺼운 넬슨 소아과학에 딱 세줄 나와있던 희귀한 병이었다. 혈소판무력증. 혈액검사하면 혈소판수는 정상인데 혈소판끼리 응집하지 못해 지혈이 되지 않는 병이란다. 아 뭔가 쎄한 느낌이 든다. 치프 선생님 표정이 바뀐다. 일단 병원으로 들어가자고...
병원에 들어와서 Glanzmann's thrombatheia에 대한 논문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나대로 치프는 치프대로 둘이서 오랜만에 학구적인 분위기다. 그런데 무슨 병인지만 실컫 나와있고 위험하다고만 되어있고 아무런 치료법이 없다. 그냥 잘 치료하라고 되어있고 위험하단다. 전라도에서 구급차로 오면 3시간이면 도착하니까 곧 도착할텐데... 서로 읽은 논문으로 치프와 토론을 했다. 우리의 결론은 혈소판은 있으나 정상이 아니니 우선 정상인의 혈소판을 수혈하여 지혈을 시켜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혈이 되고 뇌압이 높지 않으면 수술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것이고 안되면 수술하자.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어차피 수술을 바로 할 수는 없다. 수혈을 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전원을 보낸 전라도의 모 대학병원에 연락해서 아기의 혈액형을 먼저 알아봤다. 서울대병원내 혈액은행에 알아보니 하나도 없단다. 당장 없으면 아기가 죽는다고 무조건 내놓으라고 악다구니를 부리니 다행히 옆에서 듣고 있던 소아과 전공의가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소아암 환자에게 쓰려고 찜해둔 혈액인데 다행히 그 환자가 컨디션이 좋아서 이틀 정도 수혈을 미뤄도 된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일단 오늘 밤 몇시간을 겨우 버틸 수 있는 정도의 혈소판을 몇 개 구걸해서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 응급실에 아기가 도착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아기 상태가 괜찮다. 머리 아프다고 징징대기는 하지만 팔다리도 잘 움직이고 엄마와 의사소통도 잘 된다. Brain CT를 다시 찍었는데 전라도에서 가지고 온 수시간 전 CT에서보다 극소량 출혈이 늘었다. 수술을 하긴 해야한다. 적십자혈액원에 연락했다. 몇시간 정도 원내에서 구걸한 혈소판으로 버티지만 수술하려면 혈소판 수혈이 대량으로 필요하다고 했더니 없단다. 무슨 소리냐고 따졌다. 그 시절에는 따지고 윽박지르면 신경외과 1년차 레지던트가 대부분 이길 수 있기때문에 열심히 소리쳤더니 정말 서울 시내에 혈소판이 하나도 없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21세기 대한민국에 그것도 수도 서울에서 혈소판이 하나도 없냐고 따졌더니 혈소판은 유통기한이 3일이라 연휴 전에 받아놓은 혈소판은 이미 다 소비해서 없고 연휴에는 헌혈의 집이 문을 닫아서 혈소판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없다. 큰 일이다.
지금부터는 헌혈을 받는 것이 환자를 살리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방송국에 연락해서 자막을 내보냈다. 혈소판 급구. 공중파 이외에 게임, 낚시 채널에도 보냈다. 방송을 보고 서울대병원으로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밤새 드문드문 찾아와주었다. 그 사이에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 자체는 비교적 흔히 하는 간단한 외상성경막외 혈종이라 두피 열고 두개골 열어서 혈종을 제거했다. 다행히 미리 수혈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그럭저럭 지혈이 되었다. 문제는 수술 직후부터 꾸준히 혈소판 수혈을 해야하는데 이미 수술 중에 사용할 것도 모자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혈소판이 꾸준히 수술장으로 공급이 되었다. 수술 마치고 나와보니 인근 혜화경찰서에서 경찰들이 단체로 찾아와 헌혈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살았다.
앞으로 열흘 정도 수술후 관리를 잘 해주고 실밥 뽑아서 퇴원시키면 된다. 매일 혈소판 수치를 확인하고 정상 혈소판 수치의 2배가 되도록 수혈해서 맞춰주었다. 소아과 혈액 세부 전공인 교수님께도 협진해서 이런 식으로 치료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워낙 희귀한 일이라 정답은 없고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으니 그렇게 치료해보라고 하신다. 이런 답변은 처음이다. 그 후로도 매일 경찰들이 헌혈을 해주었고 그 아기는 주기적으로 수혈받으며 잘 버텨주었다. 내가 생각해낸 치료 방법이 맞았던 것 같다.
아기는 참 이뻤다. 아직 말도 정확히 못하고 엄마에게 업혀 칭얼대며 잠드는 전형적인 귀염둥이 아기였다. 어느날 밤 병동에 앉아 낮에 밀린 일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재우는 소리가 들린다. 자장가를 불러주며 불이꺼진 병동 복도를 이쪽 저쪽 끝으로 걸어다니신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자장가에는 아기 이름이 들어간다. 아무리 들어봐도 내 환자의 이름이 아니다. 그러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는 엄마 등에 잠이 들어있다. 노래 속에 나오는 그 아기 이름은 누구냐고 애기 엄마에게 물었다. 갑자기 애기 엄마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애기가 깰까봐 숨죽여서 겨우 한참을 울고나서야 애기 엄마가 대답해주었다. 같은 병으로 몇 년 전에 죽은 첫째 아이의 이름이라고 둘째 살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셨다. 나는 아직도 첫째와 둘째 이름을 모두 정확하게 기억한다.
드디어 실밥만 뽑으면 내일이라도 퇴원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오전에 실밥을 뽑았다. 오후 회진을 갔더니 실밥 뽑은 자리가 불룩해졌다. 피하에 출혈이 생겼고 점점 커진다. 아 이런 혈소판 수혈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충분히 혈소판 수혈을 했고 수술로 피하 혈종을 제거하고 다시 2주를 기다렸다. 우여곡절 끝에 아기는 전라도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외래 진료 때 한두번 얼굴을 보았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그 아기가 성인이 되어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